제26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반월당에서 만난 얼굴들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1학년 황유찬
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불 속에서 투덜거렸다. 일요일인데 교복을 챙겨 입어야 한다니.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짓다 말고 "시험을 앞당긴다니 그게 무슨 소리고" 하시며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나도 딱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그렇게 하라니까 가는 거였다. 아버지는 신문을 뒤적이며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 그 침묵 속에 뭔가 못마땅함이 섞여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무렵 어른들 사이에서는 3월 선거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한숨 섞인 말들이 밥상머리에도 오르내렸다.
집을 나서 학교로 향하는 길, 골목마다 교복 입은 아이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밝지 않았다. 앞서가던 옆 반 아이가 나를 보더니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만 그런 거 아니래. 대구고는 토끼 사냥하러 간다더라." 나는 헛웃음이 났다. 이 추운 겨울에 무슨 토끼 사냥인가. 다른 골목에서 만난 친구는 대구여고에서는 졸업생 송별회를 한다고 들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오늘이 민주당 장면 박사의 유세가 있는 날이라는 것을. 그리고 학교가 우리를 유세장 근처에도 못 가게 하려고 온갖 핑계를 짜냈다는 것을.
교실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이미 여느 등굣길과 달랐다. 평소라면 장난치고 떠들었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학교가 술렁였던 걸 나도 알고 있었다. 학생회 형들이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그날은 민주당 강연회가 있는 날이 아니냐"며 등교 지시를 거둬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 학생위원회가 열려 시험 일정 변경이 부당하다는 결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벌써 학년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에는 위원장 형의 집에 우리 학교뿐 아니라 대구고, 사대부고 형들까지 모여 밤늦도록 무언가를 의논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정확히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오늘 뭔가 벌어질 거라는 예감만은 교실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담임 선생님도 평소와 다르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낮 12시 50분, 스피커에서 조회 소집 방송이 흘러나왔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사이로 위원장 형이 조회단 위로 올라서는 게 보였다. 손에 든 종이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게 시작했지만 점점 커졌다. "학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부당한 처사를 시정하고, 학원 내의 학구적 자유를 찾기 위한 우리의 뜻을 사회에 알리자." 거기까지 들었을 때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몇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함성을 질렀고, 그 소리는 순식간에 운동장 전체로 번졌다. 손뼉 소리, 발 구르는 소리, 누군가의 울음 섞인 외침까지 뒤섞였다. 나도 정신을 차려보니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교문 쪽으로 학생들이 밀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몇 분이 팔을 벌리고 막아섰지만, 800명 가까운 학생들의 걸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 물결에 휩쓸리듯 교문을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미처 나오지 못한 아이들이 담을 넘고 있었다.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 친구의 손을 잡고 뛰어내리는 모습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눈에 박혔다. 거리로 나선 순간, 차갑던 2월의 공기가 오히려 뜨겁게 느껴졌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아스팔트의 감촉조차 낯설게 생생했다.
반월당으로 향하는 길, 저 멀리서 또 다른 교복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대구고 학생들이었다. 어제 형들끼리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던 그 말이 사실이었다. 두 학교 학생들이 한 덩어리로 합쳐지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무섭기보다 든든했다. 혼자였다면 절대 낼 수 없었을 용기가, 옆에 선 얼굴들 덕분에 자꾸 차올랐다. 중앙로를 지나면서는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하나둘 붙었다. 여고생들의 하얀 카라가 유독 눈에 띄었고, 공고·농고 학생들의 낡은 작업복 같은 교복도 섞여 들었다. 상고 쪽에서 뛰어온 학생 하나는 숨이 턱까지 차 있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우리도 왔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대열에 끼어들던 그 얼굴을 나는 오래 잊지 못했다.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지나가던 상인들이 가게 문을 열고 나와 우리를 구경했고, 몇몇은 손뼉을 쳐주었다. 경상북도청 쪽으로 걸어가던 중, 저 앞에서 유세장으로 향하던 장면 박사의 행렬과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도, 시험도, 학교도 다 잊혔다. 그저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을 우리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는 사실만이 선명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골목 어귀에서 경찰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 앞에 있던 아이가 끌려가며 넘어졌고, 나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비명과 구호 소리가 뒤섞여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경찰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애들한테 왜 이러노!" 그 말을 신호로 몇몇 어른들이 우리와 경찰 사이로 끼어들었다. 누군가는 도망치는 친구를 자기 가게 안으로 잡아끌어 숨겨주기도 했고, 어느 국숫집 주인은 아예 가게 셔터를 반쯤 내리고 학생들을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어른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걸 느낀 순간, 참았던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라디오 뉴스를 듣는데도 아직 심장이 뛰고 있었다. 잡혀간 형, 누나들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뿌듯한 마음도 있었다. 어머니는 흙 묻은 내 교복을보시고는 아무 말 없이 옷을 받아 드셨다. 혼내실 줄 알았는데, 그저 조용히 등을 두드려 주실 뿐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분위기는 또 달랐다. 몇몇 선생님들은 연행된 학생들 때문에 밤새 경찰서를 오갔다는 소문이 돌았고, 교장 선생님은 굳은 얼굴로 훈화를 하셨다. 잡혀갔던 형, 누나들도 하나둘 풀려나 돌아왔지만, 그들의 눈빛은 어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딘가 더 단단해진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대구 시내 신문들은 우리의 시위를 크게 다루기 시작했고, 그 소식은 삽시간에 다른 도시로도 퍼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에서도, 마산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터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지핀 불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붙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해 4월, 서울을 비롯한 온 나라가 들고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두 달 전 그 일요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험을 앞당긴다는 어이없는 핑계 하나로 시작된 하루가, 훗날 한 시대를 무너뜨리는 첫걸음이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그저 부당하다고 느낀 것에 목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가끔 그날의 반월당 거리를 떠올린다. 두려움에 떨리던 손, 그 손을 붙잡아 준 친구, 우리를 감싸주던 이름 모를 어른들의 얼굴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문을 나섰고, 거리로 나섰고, 목소리를 냈다.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걸, 나는 그해 겨울 반월당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