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2월의 외침, 4월의 함성
원화중학교 3학년 이나영
봄바람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갔지만, 거리에는 냉랭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묵묵히 걸었다. 누군가는 깃발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두 달 전에도 봄은 이렇게 조용했다. 햇살은 운동장을 가만히 비추고 있었고, 바람이 모래를 살짝 일으켰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그날 우리의 발걸음만은 평소와 달랐다.
사흘 전 선생님께서는 나른한 종례시간,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통보를 내리셨다. 난데없는 부름에 마음이 무거워진 우리는 눈치를 살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흘렀고 우리는 불길한 전조를 알아차렸다. 그날은 장면 후보의 유세가 있는 날이었다. 일요일 등교가 우연일 리 없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었다. 정권의 의도에 분통이 차올랐다. 붉은 노을이 번질 무렵, 나를 포함한 여러 학생들이 모였다. 대구고, 사대부고, 경북고 등 다양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한 후, 거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민족의 역사를 뒤바꿀 결의문을 만들었다. 서걱서걱 글을 써내려갈 때, 불쑥 겁이 나기도 했다. 친구들 역시 말이 없었다.
그때 한 학생이 운을 띄웠다.
“우리가 계획한 일로 사형을 받게 될지도 몰라, 아무튼 철창에서 만나자. 아니면 천당에서 만나자.”
잠시 흐르던 침묵 끝에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부르짖는 우리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잠겨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요일 아침 조례시간, 학생들은 운동장에 빽빽히 모여있었다. 대표 학생이 부리나케 강단 위로 올라갔다. 강단 위에선 그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가 결의문을 펼쳤다. 그리고 낮지만 단단한목소리로 운동장을 울렸다.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운동장을 메운 침묵은 결의로 바뀌고 있었다. 우리는 결의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문을
뛰쳐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뛰었고, 외쳤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친구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민주주의를 살리자!”
우리의 외침에 이끌린 시민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왔다. 나와 눈을 마주친 시민분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순간 경찰관들을 마주하였다. 목이 바짝 마르고,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굳어 버린 내 손을 친구가 힘껏 붙잡았다. 그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 멈췄던 발걸음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학생들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하지만 뒤에선 경찰들이 학생들을 여럿 연행하고 있었다. 잡혀가는 친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끝내 닿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날 우리의 외침만큼은 그 거리에 남아 있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너무도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교복은 이제 거리 곳곳으로 번져 있었다.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장사를 멈춘 상인도,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어머니도, 굳은 표정으로 거리를 지키던 아버지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달 전 우리가 내디뎠던 한 걸음은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되어 있었다. 문득 내 곁에 서 있던 후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같이가자.”
후배는 말없이 내 손을 맞잡았다. 차갑게 떨리던 손끝이 조금씩 힘을 되찾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친구가 내게 건네준 용기는 시간을 건너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졌다. 운동장에서 시작된 우리의 한걸음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걸음은, 4월의 거리에서 모두의 발걸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