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순응이라는 안전지대, '왜'라는 도화선
자카르타한국학교 권하연
눈을 뜨자마자 드는 생각은 하나다. "십 분만 더…" 하지만 알람은 그런 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6시 30분까지 학교에 도착하려면 이불을 박차고 급히 일어나야 한다. 씻고 허둥지둥
아침을 넘기며 집을 나서면, 등굣길 창밖으로 낯선 이 도시의 새벽이 지나간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향하며, 하루의 절반 이상은 이미 누군가가 짜 놓은 시간표대로 흘러간다.
멀리 타국에서 재외한국학교를 다니다 보면, 교실 밖 풍경은 온통 낯선 외국어와 이국적인
간판들뿐이다. 그런 풍경 속에서도 우리 반에는 늘 태극기가 걸려 있고, 귀에 익은 한국어로
수업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나에게 대한민국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였으며, 그곳은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민주주의를 지켜 낸 나라라고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란 그 시절 한국 학생들의 하루는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들의 일상은 오히려 더 답답하고 규제투성이이지 않았을까. 등교 시간은 훨씬 더
빨랐을 것이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조차 부족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관련 자료를 찾아보던
중, 나는 1960년 2월의 대구에서 시선이 멈췄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대구의 여덟 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일제히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경북고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는 토끼 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등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명분뿐이었다. 고작 학생들의 발을 묶기 위해 내세운 핑계치고는 너무도 조잡했으나, 이 뒤에는
진짜 목적이 따로 숨어 있었다. 그날 대구에서 예정된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정권이 학교라는 울타리를 이용해 그들을 붙잡아 두려 했던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고민해 보았다. 아마 처음에는 그냥 짜증이 났을 것이다. 일요일에
학교라니 억울하고 피곤하다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 나의 반항은 작은 투덜거림에
그친 채 결국에는 등교했을 것 같다.
나는 꽤 순종적인 학생이다. 이유가 석연치 않은 지시라도 윗사람이 정한 일이면 일단 따르고
본다. 괜히 나섰다가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게 질문보다
순응이 안전하다고 믿으며 살아왔기에 아마 66년 전의 그날도 내게는 의문조차 없는, 그저 피곤한
하루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등교 지시가 내려진 다음 날 밤,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를 비롯한 학생들이 몰래 모여
결의문을 작성했다. 다음 날 낮 12시 50분, 800여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인 자리에서 그
결의문이 낭독되었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다해 싸우겠다는 문장은 지금 읽어도 서늘하다. 어린
학생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겁이 많아 숨었을
나와 비교되어, 더욱 인상 깊었다. 학생들의 낭독이 끝나고, 잠시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으나,
한 명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곧 모두가 뗐다. 교사들의 만류는 그 걸음을 붙잡지 못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하나둘 거리로 모여들었다. 그날 하루,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의 발소리가 대구
시내를 가득 메웠다.
교문을 나선 것은 학생들이었지만, 흔들린 것은 교문 밖의 세상이었다.
그들이 외친 것은 거창한 정치 구호가 아니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교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였다. 이들은 거대한 혁명을 바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 달라고 소리쳤을 뿐이다. 시험을 준비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미래를
고민했을 평범한 학생들이 순응 대신 교문을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가만히 숨어
침묵하는 일이, 저들의 부당한 지시를 묵인하고 찬성하는 꼴이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런 순간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막상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그들처럼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안다. 66년 전 대구의 학생들이 지켜낸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부당함 앞에서
"왜?"라고 당당히 물을 수 있는 권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작은 질문은 대구를 넘어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오늘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자유 역시 그
날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내일도 알람은 울릴 것이고, 나는 여느 때처럼 "십 분만 더..."를 중얼거리며 낯선 언어들 사이를
지나 등교할 것이다. 일상은 그대로이지만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교실에 걸린 태극기가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그저 한국인임을 알려주는 표식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그 깃발 아래에 부당함에 맞서 "왜?"라고 물었던 평범하고도 위대한 이들이 있었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