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푸른 제복의 거울, 시들지 않는 봄을 위하여
경북공업고등학교 1학년 허성율
1. 2월의 그늘과 얼어붙은 교실

해마다 2월 끝자락이 되면, 바람 끝에 서린 차가움 속에서도 이상하게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곤 한다. 그것은 계절이 품고 있는 자연의 서늘함이라기보다는, 60여 년 전 대구의 아스팔트 위를 적셨던 아이들의 숨결이 여전히 그 길 위에 짙게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 2월. 당시 대한민국은 짙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정권의 탐욕은 끝이 없었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헌법 조항 속에나 갇혀 있는 무기력한 단어에 불과했다. 독재의 그늘은 학교 문턱까지 깊게 드리워졌다. 당시는 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다. 정권은 어린 학생들이 유세장에 모여 민주주의의 열기를 느끼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내려진 지시가 바로 '일요 등교'였다.

"일요일에 토끼를 잡으러 가자."
"영화 관람을 해야 하니 전원 등교하라."
"기말고사를 앞두고 특별 자습을 실시한다."

어른들이 내민 등교의 이유는 유치하다 못해 치사했다. 그 기만적인 명목 뒤에 숨겨진 진실은 단하나, '너희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갇혀 침묵하라'는 강요였다.

차가운 시멘트 교실에 갇힌 10대 소년·소녀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끝에는 이미 봄을 품은 봉오리들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발을 교실 안에 묶어둘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교복 속에 감춰진 청춘들의 순수한 정의감, 그리고 거짓을 거짓이라 말할 수 있는 곧은 양심이었다. 그 유치한 억압은 오히려 아이들의 가슴 속에 참아왔던 분노의 불씨를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2. 담장을 넘은 가방, 아스팔트 위의 첫 발자국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어른들은 치사하게 아이들을 가두지 말라!"

마침내 침묵의 제방이 터졌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대구상고, 대구공고, 대구여고, 효성여고, 경북여고… 대구 시내 8개 학교 1,200여 명의 학생들은 통제와 압박의 담장을 차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방을 교실 바닥에 던져두고, 헐렁한 교복을 입은 채 담장을 넘는 학생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거대한 선언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돌멩이도, 화염병도,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도 없었다. 오직 곧게 편 등과 정직한 목소리, 그리고 어깨를 괸 채 서로를 의지하는 체온뿐이었다.

경찰들의 최루탄 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경찰봉이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제복을 입은 어린 투사들의 무릎이 깨지고,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스크럼을 짠 아이들의 대열은 경찰의 차단선을 뚫고 대구 도심을 향해 나아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대구 시민들의 가슴에도 거대한 파도가 쳤다. 길가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는 상인들, 경찰의 눈을 피해 매 맞은 학생들을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숨겨주던 언니와 누나들, 택시 경적을 울리며 학생들의 뒤를 호위하던 운전기사들… 그날 대구의 거리는 더 이상 억압받는 자들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의에 맞서 하나가 된 민중의 거대한 광장이었다.

2.28 민주운동은 그렇게 탄생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청년 학생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불의와 독재에 맞서 일어난 최초의 민주화 운동. 그것은 비단 대구라는 지역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억눌려 있던 온 국민의 가슴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정의의 불씨를 당긴 위대한 번개였다. 이 작은 번개는 곧이어 3.15 마산의거의 폭발로 이어졌고, 마침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라는 거대한 민주주의의 태풍으로 승화되었다.

3. 유산으로 남겨진 평화와 빚진 자의 통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롭다. 우리는 일요일이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거나 친구를 만나고, 인터넷 공간에서 권력자를 비판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한다. 투표소에 들어가 스스로의 의지로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일 역시 너무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당연함'의 무게를 가만히 달아본다. 우리가 공기처럼 무심하게 누리는 이 모든 자유와 평화는, 사실 1960년 2월의 차가운 거리 위에서 제 교복을 적시며 달렸던 수많은 '이름 없는 형과 누나들'이 목숨과 청춘을 담보로 적립해 둔 '역사의 유산'이다.

글쓰기 출품작들을 읽어내려가며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던 이유는 바로 이 깊은 부채감 때문이다. 그들은 거창한 위인이 아니었다. 우리처럼 시험 점수에 울고 웃고, 매점에서 빵을 사 먹으며 수다를 떨고, 짝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 졸이던 아주 평범한 10대들이었다.

만약 그날 그들이 어른들의 비겁한 요구에 타협하고 따뜻한 교실 안에 안주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 하나쯤이야'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더라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봄은 훨씬 더 늦게, 훨씬 더 잔혹한 대가를 치른 후에야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한 자락을 바쳐, 후대가 걸어갈 길 위에 '자유'라는 단단한 돌을 깔아준 것이다.

4. 오늘, 우리 삶 속에 켜는 2.28의 촛불

그렇다면 60여 년이 지난 오늘, 2.28 민주운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단지 일 년에 한 번 국화를 바치고 역사 교과서의 한 단원을 암기하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는 끝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한 번 완성되어 영원히 유지되는 보석이 아니다. 그것은 조금만 방심하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시들어버리는 살아있는 정원과 같다. 오늘날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2.28의 정신은 거창한 정치적 투쟁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일상 속에서 깨어있는 양심'이다.

학교나 직장에서 다수의 폭력 앞에 소외당하는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것,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그늘 뒤에 숨어 타인의 인권을 짓밟지 않는 것,
불의와 불평등을 목격했을 때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이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작지만 단단한 용기를 갖는 것.

우리가 일상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작고 소소한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순간마다 1960년 대구 거리에서 불타올랐던 2.28의 촛불은 다시금 우리의 가슴 속에서 켜지는 것이다.

5. 다시 푸른 들녘을 바라보며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교정을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바람을 가르며 외치던 그날 학생들의 함성은 이제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지만, 그들이 남겨준 '빼앗기지 않은 들녘'에는 오늘 수많은 아이들이 웃으며 뛰놀고 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은 죽어버린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가 불의와 타협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는 묵직한 경종이며, 우리가 타인을 향해 따뜻한 손을 내밀게 만드는 생생한 체온이다.

1960년 2월 28일, 그 푸르렀던 청춘들이 우리에게 선물해 준 이 눈부신 봄날의 들녘 위에서,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나지막이 답할 차례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이 소중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잊지 않겠습니다. 불의에는 당당히 저항하고, 약자의 손은 따뜻하게 잡으며, 당신들이 트어낸 이 작은 민주주의의 싹을 더욱 울창하고 푸른 숲으로 가꾸어 나가겠습니다."

그들의 순수한 용기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봄은 이토록 눈부시도록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