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담장이 신조를 가져도 될까요?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3학년 임동빈
오늘도 하늘은 무척 맑습니다. 몇몇 화단에는 꽃이 피었네요. 코앞이 3월인 만큼 슬슬 봄바람이 불 계절이긴 하죠. 그 사실은 60년이 지났음에도 매년 새삼스러워요.

저 멀리 검은 학생모를 쓴 아이가 책가방을 들고 오는 군요. 꽃향기에 취해있던 터라 등교 시간이 된 줄도 몰랐네요. 아이는 강렬한 햇살과 아직은 서늘한 바람에 이리저리 치이며 교문으로 들어섭니다. 그 이후 하나, 다시 둘. 마치 짜고 맞춘 듯 아이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해요.
아이들의 말소리는 휑한 거리를 가득 메워 버리고는 합니다. 그 속에는 노랫말도 있고, 활기찬 웃음소리와 인사말도 약간 뒤섞여 있어요. 마음 같아선 친근히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함께 웃고 싶을 정도예요.

그러나 저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예, 저는 담장이니까요.

담장이 하는 일이라곤 뻔하죠.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제 역할이에요. 수업을 안전하게 들을 수 있도록 돕는 거죠. 지루하지 않냐고요? 전혀요. 오히려 담장으로서 들을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예컨대 2반 영수의 연애편지가 있겠네요. 얼마 전 인근 여고 학생과 눈이 맞아서 편지를 주고받는다죠? 그걸 친구들이 발견해서 하교 시간만 되면 놀려대곤 했어요. 볼이 복숭아가 된 영수가 어찌나 풋풋해 귀엽던지. 또 4반 수철이는 월말고사를 망쳐 아버지께 혼날까 봐 시험지를 구겨 화단 옆에 묻어놨어요. 누가 볼세라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게 재밌었는데, 시간이 지난 요즘은 그 사실을 잊었는지 화단 옆으로 잘 오지 않더라고요. 이제 그 비밀은 온전히제 몫이 된 것 같아요.

괜찮아요. 바라본 것들을 품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 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게 좋고, 그 아이들의 웃음기 가득 띈 얼굴을 보이는 순간순간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은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어느덧 아이들이 고대하던 하교 시간인데, 교문을 나서는 표정들이 그다지 좋지 못해요. 하굣길 학생들 사이가 유독 어수선한 건 제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이윽고 불만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어요. 무슨 일인 걸까요? 저는 이번에도 기웃거리며 그들의 속삭임을 엿들어봅니다. 이런, 학교가 일요일에도 등교를 하라고 했나봐요.

저는 영문 모를 학교의 결정에 위구심이 들었습니다. 왜 일요일에 학교에 오라는 걸까요?
아이들의 입에서 몇몇 사람의 이름이 오가곤 했는데 전부 생소했어요. 유세라는 단어로 보아 나랏일과 연관된 듯 싶은데, 우리 학교 아이들과 선거가 무슨 연관이라고 일요일 등교를 시키려는지요. 설마 학교에서 무어라 꿍꿍이를 펼칠 작정인 걸까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곧 있을 학기말 시험에 영향을 줄지도 모를 일이에요. 아이들은 한편의 침울함과 무력함이 범람한 얼굴로 흩어지네요. 이후로 제 밤낮은 한층 심란해지고 말았습니다.

아, 생각났어요. 그 지시는 아마 어느 한 노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근방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며 돌아다니는 그 노래 말이죠. 사흘 전 8반 창석이가 부르다 경찰에게 주머니를 수색당하기도 했어요. 엿듣기로는 영화 주제가로 나온 곡을 수정해 문제가 됐다더군요.
그 곡의 가사에서도 사람 이름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그 이름 몇몇이 조금 겹치네요.
아이들은 나랏일에 관여하고 있는 걸까요?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고작 담장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여전히 아이들을 지키는 것 뿐입니다. 제게는 나랏일보다 그게 더 중요하고 소중해요. 경찰의 질문 세례를 받은 창석이가 뒷목에 난 땀을 닦는 모습이 여전히 기억나요. 저는 쉴 수도 없는 한숨에 고달파하며 해가 뜨길 기다립니다.

다음날, 학교는 시끄러워졌어요.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무언가 따지듯 되묻는 게 복도 창문 너머로 들려옵니다. 서로의 의견이 엇갈려 입씨름도 벌어지나봐요. 학교 안은 성토로 난무하고 있어요. 저는 어쩔 줄 몰라, 아이들의 말소리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온몸으로 막아봅니다. 격정에 찬 목소리가 사방을 질주하니 너무나 어지러웠어요.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이 정도로 분노하는지, 담장으로 가만히 서 있는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네요. 그날 학교에는 조용한 곳이 없었습니다.

일요일이 다가올수록 아이들은 달라져만 갔어요. 제가 사랑한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근엄한 얼굴로 교문에 들어섰죠.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사람들처럼요. 저는 그 결심에 대해 알아보려 했으나 선생님이 지나가실 때면 입을 꾹 닫아버리니 쉽지 않네요. 그저 불의니 신조니 하는 무게감 있는 단어들만이 복도를 맴돌아요. 저는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불의를 외면치 않는 것이 아이들이 떠드는 학생의 신조라지만, 제 신조는 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뿐인걸요.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려 한다면 저는 담장으로서 이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제가 해온 일도, 저의 탄생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테니까요.

해가 뜨려는 새벽, 저는 뒤늦은 시간에서야 달에게 물어보아요. 해가 뜨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예요. 아이들은 이미 결심을 굳혔겠죠. 그러니 묻습니다, 담장이 신조를 가져도 될까요? 저는 아이들을 지키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나 달은 답을 주지 않았어요. 달에게도 제 목소리는 닿지 않나 봐요. 저는 외로이 새벽 내음에 파묻힙니다. 부디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일요일 점심, 오늘도 하늘은 무척 밝습니다. 이제 화단에는 꽃의 종류가 제법 많아졌어요.
봄바람이 겨울을 전부 몰아냈다는 증표겠죠. 그러나 학생들은 봄날의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비장함으로 챙을 눌러씁니다. 몇몇 아이들은 심장 부근을 부여잡으며 긴장을 풀기도 하네요. 검은 학생모가 운동장을 가득 메운 건 순식간이었어요. 그곳에는 2반 영수도 있었고, 4반 수철이도 함께였어요. 심지어 8반 창석이도 보이네요. 운동장은 학생들의 결심으로 가득 들끓습니다. 그 결심을 딛고 한 학생이 조회단 앞에 나섰어요. 그러고는 무언가를 펼쳐 읽어내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결의를 멀리서 바라봅니다. 위엄있는 목소리가 학교를 집어삼키는 모습을요.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생의 낭독이 끝나자, 아이들은 불타는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불길의 크기와 관계없이 저는 알 수 있었어요. 저 아이 중 몇몇은, 불의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것을요. 아이들의 신조는 빛나고 결의는 황홀했으나, 그것들만으로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선생님 몇분도 저와 같은 생각인지 아이들을 말리셨어요. 너희가 나서면 무엇이 바뀌냐고, 다칠 수도 있다며 아이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어요. 순식간에 인파는 교문을 향해, 제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저는 제 신조를 지켜야 했으므로, 담장의 본분으로 아이들의 앞에 섰습니다. 여길 넘어가면 위험하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아이들은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런, 제게는 입이 없는데 말이죠. 아이들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거예요. 그 사실을 지각한 순간 이미 결심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보았어요. 저를 지나가는 아이들은 구호를 외치며 다시금 웃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웃겼던 걸까요? 저는 밖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연애 편지 대신 무언가를 쥐고 있는 영수, 이번엔 묻지 않은 수철이, 더 이상 뒷목에땀이 나지 않는 창석이, 그 외 수많은 표정을 짓고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이들을.

아, 그것은 결심이군요. 아이들은 결심으로 웃고 있어요. 자신들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려 말이죠.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전교생이 몰려 나가자, 운동장은 흙먼지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선생님들은 콜록거리며 기침하고 계시네요.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들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도록 비는 것뿐이라는 사실을요. 제가 아이들을 지키려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자신만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네요. 그토록 걱정한 것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에요.

동방의 빛들아, 나아가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구호가 멀리 울려퍼지니,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운동장이 눈에 들어와요. 그들의 눈은 불의에 맞서는 맹렬함으로 가득합니다. 이제 인정해야겠어요. 그들은 더는 아이들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학생들의 함성과 외침이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다 함께 뛰어가 지진이라도 난듯했던 땅도 도로 잠잠해집니다. 수많은 재잘거림이 머물렀던 이곳에서 침묵은 값비싸죠. 저는 먼지가 흩날리는 텅 빈 길가를 바라봅니다.
이 이야기도 제가 기억해야 할 몫이겠죠?

괜찮아요. 바라본 것들을 품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