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달콤한 일요일을 빼앗긴 언니 오빠들의 용기
새론초등학교 5학년 김채원
2월 28일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먼 옛날인 1960년, 대구의 수많은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거리로 나서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 슬프고도 자랑스러운 역사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 했다. 심지어 우리 민족에게 큰
아픔을 주었던 친일파 사람들을 조용히 뒤에서 도와주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대통령이, 정작 나라를 빼앗았던 사람들을 편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초등학생인 내가 생각해도 참 황당하고 화가 난다.
초등학생인 나조차 안 사실을 그 당시 국민들이라고 몰랐을까? 이승만 정부(자유당)을 향한
국민들의 마음은 냉정했다. 1950년에 열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 편이었던
국회의원들이 대거 떨어지고 만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이 돌아서자 이승만 대통령은 불안해졌다.
마침 한 달 뒤에 6·25 전쟁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다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본인의 안위만
지키기만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제’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대로는 자신이
다시 당선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직접 선거제’로 법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강제로 끌고 가며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을 ‘부산 정치 파동’이라고 부른다. 결국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법이 바뀌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두 번째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던 걸까? 이승만 대통령은 세 번째 대통령까지 또 하고 싶어졌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을 딱 2번까지만 할 수 있다고 분명히 정해져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처음 대통령을 한 사람에 한해서는 횟수 제한을 없앤다’는 말도 안
되는 법 개정안을 또 내놓았다.
이 법이 통과되려면 국회의원 203명 중 3분의 2인 ‘136명’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그런데 투표
결과는 ‘135표’였다. 딱 한 표가 부족해서 통과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꼼수에 강한
자유당과 정부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수학적으로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3...
이니까, 반올림을 하면 135명이 맞다고 우긴 것이다. 아직 초등학생인 나도 학교 시험 문제에서
이런 식으로 반올림을 했다간 분명히 틀렸다고 선생님께 혼이 날 텐데 말이다. 자유당은 아직
수학의 기초도 모르나보다. 이런 부끄러운 억지와 우김으로 결국 법을 통과시키고 3대
대통령에까지 당선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수학의 반올림 원리를 엉터리로 가져다 붙인 ‘사사오입
사건’이다.
시간이 흘러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얼마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될 확률이 아주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욕심 많은 자유당은 부통령
자리까지 확실하게 차지하기 위해 전 국민을 상대로 엄청난 부정 선거를 계획했다.
그 방법들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다.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고무신이나 막걸리를 나누어 주며 표를 샀다. 투표할 때는 3명씩 짝을 지어 서로
누구를 찍는지 감시하게 했고, 완장을 찬 사람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리
가짜 투표용지를 가득 채워두는 사전투표, 다른 표를 끼워 넣는 ‘샌드위치 표’, 잉크가 마르지 않은
표를 겹쳐 무효로 만드는 ‘피아노 표’, 밤중에 몰래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올빼미 표’까지 온갖
나쁜 방법이 동원되었다.
내가 집에서 엄마한테 잘못을 저질러도 1~2번은 실수라며 용서해 주시지만, 3번 이상이 되면
고의라며 크게 혼이 난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이런 무서운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정말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토록 탐이 났던 걸까?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이렇게까지 무시해도 되는지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불의를 보고 가장 먼저 참지 못하고 일어난 이들이 바로 대구의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었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정부는 학생들이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학교에 나오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 나에게 일요일은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평일 동안 못 만났던 가족,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하게
쉬는 소중한 날이다. 일주일을 기다려온 달콤한 일요일을 억지로 빼앗긴 언니, 오빠들의 마음은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을까?
학생들은 이 부당한 명령에 당당히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거리로 뛰어나와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대통령은 각성하라!”며 외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운동의 위대한
시작이 된 ‘2·28 민주운동’이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뜨거운 용기는 횃불처럼 번져나가 마산의 ‘3·15 의거’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되었던 김주열이라는 고등학생 오빠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으로만 봐도 가슴이 미어지는 슬프고도
분노스러운 모습에 전 국민이 일어났고, 결국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으로 피어났다.
국민들은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굳센 잔디처럼 끝까지 싸워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나 같으면 무섭고 두려워서 이불 안에서 동생 손을 꼭 잡고, 벌벌 떨며 엄마, 아빠만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조차 가슴이
쿵쾅거리고 떨리는데, 총칼을 든 무서운 어른들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은 얼마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려웠을까? 하지만 그 당시 대구의 언니, 오빠들과 수많은 시민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먼 미래에 태어날 우리 초등학생들을 위해 그 무서움을 용기로 바꾸어 꾹 참고 싸웠다. 그
사실이 정말 대단하고 가슴이 찡할 정도로 감사하다. 언니, 오빠들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라는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자유롭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 아닐까?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을 어기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국민들이 평화롭게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우리가
지금 주말마다 교회를 가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당연하게 누리는 평화롭고 행복한
하루하루는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5학년인 내가 역사를 공부하며 느낀 이 고마운
마음을 평생 잊지 않고 싶다. 이제 다시는 우리 역사에 이런 독재와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는
2월 28일 대구 거리 가득 울려 퍼졌던 그날 언니, 오빠들의 용감한 목소리와 눈물을 내 가슴속에
꼭꼭 기억해 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