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들풀
부산진여자중학교 3학년 고규진
한 번쯤은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피어난 들풀을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름조차 모른
채 스쳐 지나가고, 누군가는 잡초라며 발길질을 해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생명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멈춘다. 꽃집의 단정한 꽃들도 아름답지만, 내 마음을 오래 붙드는 것은 이름 없는
들풀과 들꽃들이다. 흙 한 줌 보이지 않는 회색 아스팔트 사이에서 어떻게 저토록 선명한 초록을
피워 내는지, 물 한 바울 스며들 틈조차 없는 메마른 땅에서 어떻게 계절마다 새로운 빛깔을 품어
내는지 바라볼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길 위의 들꽃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우리 민초들의 삶이 떠오른다. 화려한 권력도,
이름난 영웅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 시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디며 오늘을 살아낸 사람들 말이다.
한국사를 공부할 때면 나는 자연스레 현대사에 가장 오래 머문다. 흑백사진 속에는 익숙한
정치인들의 얼굴이 먼저 눈에 먼저 들어오지만, 내 시선을 붙드는 것은 그들 뒤편에 묵묵히 서
있는 시민들이다. 이름도 남지 않은 학생들, 노동자들, 어머니와 아버지들.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역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국민이었다.
우리 역사는 들풀이 살아남아 온 과정과 닮아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왕이 곧 나라이고 신분이
곧 운명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백성들은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 갔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했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 더는 고개만 숙이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희망을 품으려던 순간, 나라를 탐낸 일본은 총칼을 앞세워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국권을 잃은 백성들은 이름을 빼앗기고, 말을 빼앗기고, 꿈마저 빼앗긴 채
혹독한 식민지 시대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들풀은 밟힌다고 죽지 않는다. 바람에 쓰러지는 듯
보여도 뿌리는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든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러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걸고 나라를 되찾으려 했고, 이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국을 지켜냈다.
그렇게 수많은 희생 끝에 마침내 광복을 맞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의 환호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는 둘로 갈라졌고, 민족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분단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폐허가 된 땅 위에는 다시 상처만이 남았다.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민주주의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권력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국민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웠고, 민주주의는 이름만 남은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거리 한편에는 여전히 들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시민들, 가족을 위해
땀 흘리는 부모들, 교실에서 내일을 준비하는 학생들. 들풀은 조용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쉽게 부러지지 않았고, 비를 맞으면서도 말없이 뿌리를 더욱 깊게 내렸다.
사람들은 들풀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힘은 눈에 보이는 줄기가 아니라 땅속 깊이 얽혀
있는 뿌리에 있다. 들풀은 함부로 성급해지지 않는다. 햇살 좋은 날에는 다른 꽃들과 다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폭풍우가 몰아치고 누군가 뿌리째 뽑아내려 할 때는 달라진다. 보이지
않던 뿌리들이 서로를 붙잡으며 거센 힘을 만들어 낸다. 우리 국민들도 그러했다. 믿고 기다렸고
참고 견디며 더 나은 내일을 바랐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짓밟는 손길 앞에서는 끝내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먼저 들고일어난 것은 교실에 있어야 할 학생들이었다.
1960년 2월 28일.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대구의 거리에서 작은 들풀 하나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학생들은 정치에 이용되고 싶지 않았다. 야당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를 강요하고, 시험과 보충수업을 핑계로 학교에 붙잡아 두려는 부당함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교실을 나와 거리로 향했다. 그들의 손에는 총도 칼도 없었다. 오직
민주주의를 향한 양심과 용기만이 들려있었을 뿐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짧은 한 문장은 수많은 학생들의 가슴을 울렸다. 약 천이백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경찰은
그중 백이십 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그러나 붙잡힌 것은 학생들이었지 민주주의를 향한 마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날 이후 작은 들풀 하나가 떨어뜨린 씨앗은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들풀은 혼자 피지 않는다. 한 포기가 자라면 그 주변으로 또 다른 들풀이 뿌리를 내리고, 서로의
뿌리가 맞닿으며 더 넓은 생명의 터전을 만든다. 2.28 민주운동도 그러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외침은 마산으로 이어졌고, 서울로 번졌으며 마침내 4.19 혁명이라는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학생들의 용기는 시민들의 용기를 깨웠고, 시민들의 용기는 다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2.28 민주운동의 의미가 단순히 ‘첫 번째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기록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의 학생들은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민주주의란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부당함 앞에서는
함께 일어설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을 그들은 몸소 보여주었다. 들풀도 함부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견디며 뿌리를 내린 뒤에야 비로소 작은 꽃망울 하나를 틔운다. 민주주의 역시마찬가지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기다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연대가
쌓여 비로소 꽃을 피운다. 2.28 민주운동은 바로 그 첫 꽃이었다. 이후의 4.19 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의 계절은 모두 그 작은
꽃씨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2.28 민주운동을 거대한 횃불이 아니라 작은 들풀 한 포기로
기억하고 싶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누구도 쉽게 뽑을 수 없었던 들풀. 그 작은 뿌리
하나가 서로를 이어 붙이며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숲을 지켜낸 것이다.
들풀은 한 계절만 피고 지는 꽃이 아니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싹을 틔우고, 또 다른 씨앗을
남기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민주주의 역시 그렇다. 한 번 이루어졌다고 영원히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억하고 가꾸며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때 비로소 살아있는 가치가 된다.
오늘날에도 누군가는 역사를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려 한다.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의
목소리보다 권력자의 이름을 앞세우고, 아픈 역사를 지우거나 축소하려는 시도도 이어진다.
그러나 들풀의 뿌리는 그런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땅 위의 줄기는 밟힐 수 있어도 땅속
깊이 얽힌 뿌리는 누구도 함부로 끊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역시 한 사람의 힘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뿌리를 내렸기에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가끔은 “요즘 학생들은 역사를 모른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된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물론
우리 세대에도 역사를 낯설게 느끼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학생은 아니다.
눈에 띄지 않을 뿐,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배우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고민하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도 분명 존재한다. 들풀의 생명이 눈에 보이는 잎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시작되듯, 미래를 준비하는 힘도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난다.
나 역시 그 뿌리 가운데 하나가 되고 싶다. 거대한 나무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구나 이름을 아는
영웅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내가 내린 작은 뿌리가 다른 누군가의 뿌리와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단단한 토양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1960년 2월 28일, 교실을
나와 거리로 걸어 나갔던 학생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들풀은 자신을 위해 꽃을 피우지 않는다. 바람을 견디고 계절을 건너며 또 다른 생명을 남기기
위해 꽃을 피운다. 2.28 민주운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학생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하루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한 번의 시위로 끝나지 않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걸으며 아스팔트 틈에서 피어난 들풀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그저 작은 풀 한
포기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 들풀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무리 밟혀도
다시 일어나고, 아무리 메마른 땅이라도 끝내 푸른 생명을 피워내는 존재. 서로의 뿌리를 믿기에
결코 쓰러지지 않는 존재.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국사를 공부한다.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더 많은 들풀들이 서로의 뿌리를 이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폭풍이 찾아오더라도, 2.28 민주운동의 학생들이 보여 주었던 용기와 양심이 우리 안에서
다시 꽃 필 수 있도록.
멈추지 않는 들풀의 뿌리처럼, 민주주의 또한 앞으로도 계속 자라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