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입선(심사위원장상)
뜨거운 다짐을 하게 된 2·28 민주화운동
보라고등학교 2학년 김연재
등교하여 자리에 앉으니, 짝꿍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아침에도 따가운 햇빛이 쏘아대는 무더운 날씨에, 힘이 빠져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친구도 흥미를 잃었는지 시선을 교탁으로 옮겼다.

어느새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조회를 준비하셨다. 선생님 옆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새로 오신 역사 선생님이 우리 반 부담임 선생님을 맡게 되셨다고 소개하셨다. 이어서 선생님의 소개가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시자, 반 아이들은 고개를 일제히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의 몸이 엄청 다부지셨기 때문이다. 맨 뒷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니, 친구와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특히 수영을 잘하셔서 먹을 것만 있다면 종일 물에서 놀 수 있다고 하셨다. 또 역사를 전공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생일은 4년에 한 번 있다고 하셨다. 2월 29일이 생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8일에 생일파티를 연다고 하셨다. 다소 희귀한 생일인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남들은 매년 받는 생일 축하를 4년에 한 번 받으면 서운하지 않으신가?” 혼자 상상의 나라를 펼쳤다.

역사 선생님은 칠판을 두 번 쿵쿵 치시며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크게 쓰셨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누구의 말인지 아는 친구 있느냐 물으셨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미국 독립서를 기초하였고,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재퍼슨의 명언이라고 알려주셨다. 이를 증명한 분이 선생님의 아버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결집력이 아주 강한 네 단체가 있는데 바로 고려대학교 교우회, 해병대전우회, 호남향우회, 경북고등학교 동창회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이 중 세 곳에 속해 있다고 하셨다. 고려대학교교우회, 해병대 전우회, 경북 고등학교동창회이다. 선생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때로는 부자가 모임에 같이 나갈 때도 있다고 하셨다.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선거와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별안간 세상을 떠나서 이승만의 당선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예측하지 못해 삼천리 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300만 명이 넘는 국민을 희생하게 한 이승만 정권은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85년생인 이승만은 그때 나이가 무려 86세였다. 그런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선생님은 이를 대표적인 노욕이라 하셨다.

유력한 야당 후보는 장면이었다. 장면은 초등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낸 교육자 출신으로, 해방 이후 국회의원, 대사, 국무총리, 부통령을 지내서 경험이 많은 정치인이었다.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 때문에, 이승만은 이기붕의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안전판으로 이기붕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는 대표적인 야당의 도시였다. 대구 수성천변에서는 2월 28일 장면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부와 경찰은 유세를 막고자 하였다. 대구에는 8개 공립고등학교가 있었다.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대구상고였다.
학생들이 참가하면 부모까지 참가할까 봐 겁이 질린 치사하기 짝이없는 명령이었다.

2월 28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등교 지시를 내렸다. 등교의 이유는 조기 중간고사, 영화관람, 토끼사냥이었다.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갑자기 일요일에 무슨 중간고사를 치르는가. 영화를 학교에서 왜 보여주나. 학생들이 해보지 않은 토끼사냥을 왜 해야 하나. 선생님은 원래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라 하셨다. 그래서 저렇게 지나가는 개라도 비웃을 핑계를 갖다 붙여서 유세를 방해한 것이다.

그때 고등학생들은 그야말로 부잣집의 선택받은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라는 자부심도 강하였다. 일요일 등교 방침이 밝혀지자, 항의하고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연하게도 거부당하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의 학생들은 시위를 준비하였다.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낮에 경북고 학생들이 학교 구령대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후에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발을 맞추어 대구고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때 선생님의 아버지도 적극 참여하였다.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도시 대구는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 때문에 더욱 달아올랐다. 이어서 경북사대부고와 대구상고,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등의 학생들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220명의 학생이 연행되었으나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그러자 경상북도 지역의 언론들은 앞다투어 어린 고등학생들의 용기를 ‘2·28 대구학생의거’라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는 전국적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3·15 마산의거, 4·18 고려대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말을 마친 선생님은 ‘혁명’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다시 물으셨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혁명은 왕건이 신라를,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빼앗은 것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박정희의 5·16혁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이나 4·19는 엄격하게 말하면 혁명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와 정의를 위한 의거였기에 혁명보다 더욱 가치가 높다고 하셨다.

대구에는 2·28민주화운동을 기려 기념공원도 있고, 기념사업회가 조성되어 기념식도 거행한다. 특히 2018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28민주화운동은 1926년 6·10광주만세운동, 1945년 11월 신의주학생의거의 맥을 잇는 학생운동이었다. 한국 민주주의가 이렇게 성숙하게 된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선생님은 다시 칠판에 “전장에서도 사랑은 꽃이 핀다.”라고 쓰셨다.
선생님이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다니실 때 김준엽이라는 중국사를 강의한 교수님을 소개하셨다. 그분은 중국에서 활동한 광복군 출신이다. 일제와 싸우는 위험하고 바쁜 그곳에서 같은 광복군 처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처녀 이름은 민영주라고 한다.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이범석 장군이 운동장에서 주례를 써주어 결혼하였다.

선생님의 아버지도 시위 도중 한 여학생을 보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밀양으로 전학을 간 여학생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대구로 돌아와 경북여고에 진학하여 공부하고 있었다. 두 분은 금방 친해졌다. 전장에서 사랑의 꽃을 피운 것이다. 선생님은 아버지와 같이 고려대에 진학하였고 처녀는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2학년을 마치자 선생님은 아버지를 따라 해병대에 지원하여 포항에서 군 복무를 하였다. 이때 면회를 온 처녀와 백년가약을 약속하였다.

제대 후 졸업을 하고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그래서 바로 결혼하였고 첫째가 아들이었는데 바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2·28 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 얘기를 빌미 삼아,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 같은 사학과에 진학한 것이다. 선생님이 역사를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2·28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지만, 선생님에게는 역사에 대한 사랑의 꽃을 피운 사건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건은 사건을 낳는다는 말이 실감 났다.
선생님의 말씀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나에겐 울부짖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용기가 있는가. 우리 사회는 하나의 목소리로 대동단결하여 언제라도 불의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때의 뜨거웠던 대구와 비교하면, 현재 우리는 부족하기 턱이 없었다. 생각을 마치자, 곧장 마음속에 불꽃이 타올랐다. 우리의 조상들이 남겨주신 소중한 민주주의를 감사히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일상은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방송작가를 꿈꾸는 17살 문학소녀로서, 2·28을 영원히 가슴에 새긴 채로, 민주주의를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뜨거운 다짐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