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본분
대구서부고등학교 3학년 김규민
“조금 있다가 출발할 건데, 그냥 하루만 안 가면 안 돼?”

현은 떨리는 빨간 수화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바라보니 사람들이 부스 밖에서 지렁이처럼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야기는 아까부터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평소였더라면 현은 갑작스레 일요일에 학교 수업이 잡혔더라고 해도 별생각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와의 약속이 학교에서의 뜬금없는 수업과 완전히 겹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현은 수화기를 붙든 채로 눈물이 날 정도로 눈을 꾹 감았다.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현은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그녀에게 말했다.

“거기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학교 하루 안 가면 죽을 때까지 팬단 말이야.”

그럼 나는 그냥 집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또 한 달 뒤에나 다시 보고?
현의 말을 끊고 들어온 그녀는 화가 경계선까지 차오른 듯했다. 누군가가 전화부스의 문을 두드렸다. 투명한 창 너머로 언짢은 표정을 지은 남자가 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은 머리를 부여잡고 전화부스에 기대어 생각했다. 수화기가 또다시 떨리며 그녀의 소리가 부스를 울리고, 창 너머 남자의 시선은 현에게서 떼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다, 결국 벌떡 일어나 수화기에 대고 짧은 긍정의 말을 내뱉은 뒤, 신속하게 내려놓고 부스를 나갔다. 그러고는 근처 언덕에 주저앉아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예감이 좋지 않다.

찬 바람이 교복 사이로 들어와 현을 소름 끼치게 했다. 현은 빠르게 창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갔지만, 소름은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현이 계속해서 소름이 돋는 이유는 찬 바람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선생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

“어제 오빠 말 들어보니까 무슨 시위 한다던데.”

현은 그 말에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이 전화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현은 방을 굴러다니는 그녀를 불러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 안 가는 거는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인 것 같아. 지금 시위하는 틈에 살며시 끼어서 나도 학교 간 척을 하고 바로 나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주면. 현의 즉흥적인 계획을 그녀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현은 더는 자신의 불안감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현은 마음이 꺾이기 전에 빠르게 나가기로 결심한 뒤 짐을 챙겼다. 뒤에서 그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네 생일인데, 그래서 이렇게 일찍 온 건데,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은 무슨 그거 하나 안 지킨다고 나라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현은 귀에 제대로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중얼거림에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짐을 모두 챙긴 뒤, 한지가 덕지덕지 붙은 문을 열면서 현은 말했다.

“학생의 본분을 다하고 올게.”

문을 닫자마자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며 온몸을 비트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은 그녀를 무시하고 떨리는 팔을 붙들며 걷기 시작했다. 시위라고 해서 그렇게 커다랗지도 않을 것이다. 눈도장만 찍고 나오는 거다. 그런데도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현은 고개를 거세게 저은 뒤 머리를 두드려 정신을 차렸다. 시위라면 동성로 쪽일 것이다. 현은 2월 정오의 얼어붙은 공기를 느끼며 동성로를 향해 걸었다.

동성로는 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학생들은 전부 흥분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까지 있었다. 현은 최대한 시위에 엮이지 않게 학생들을 피해 다니며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두리번댔다. 운 좋게도, 현은 빠르게 자신의 반 학생을 한 명 찾을 수 있었다. 현은 소리치는 학생들 사이로 끼어들어 가 그의 어깨를 쳐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어? 너도 있었네?”

어. 그런데 솔직히 나는 이 시위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이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데, 나중에 선생님이 물어보시면 먼저 학교로 갔다고 얘기해줄 수 있을까? 그는 난리통 속에서 최대한 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현의 말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현은 답답한 마음에 그에게 더 가까이 가 말하기 시작했고, 그는 현이 말하는 도중에 현의 입을 막아버렸다.

“들었어. 못 들었다는 게 아니라, 무슨 소리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거야. 학교로 가고 싶은데 여긴 왜 왔어?”

현은 말문이 막혔다. 혹시 이 시위는 학교 가기 싫어서 하는 시위인가?
현의 중얼거림에 그는 잠시 현을 바라보더니 현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려 시야를 높였다. 검은 교복의 학생들이 얼굴이 빨개진 채로 함성을 질러가며 전진하고 있는 모습이 현의 시야 전체에 담기게 되었다. 그가 현의 멱살을 흔들며 소리쳤다.

“지금 대통령이 다른 후보 연설을 막고 있다고. 그걸 지금 항의하려고 시위하는 거잖아.

민주주의가 부서지려고 하는데, 학생이 학생 된 본분으로서 가만히 학교에 앉아 있는 게 말이나 돼?”

현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다리를 버둥거려 그가 현을 바닥에 내려놓게 했다.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현은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오늘 내 생일이라서. 민주주의 좋지. 나도 민주주의가 실현됐으면 좋겠다.
이윽고 현은 마른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현의 배를 발로 강하게 차버린 것이다. 눈물이 고인 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나라가 망하게 되면 다 너 같은 애들 때문이야.”
현은 무언가 항의하려고 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도 현 못지않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현은 아무 말 없이 시위장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