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동상(2·28원로자문위원장상)
너의 바람
왕선중학교 1학년 임나율
2월 26일,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날이었다. 나의 남동생은 오늘도 어제처럼 잔뜩 화난 얼굴로 하늘이 어둑어둑해 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디어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면서 팔짝팔짝 뛰는 순진한 아이였는데, 요즘 따라 얼굴에 웃음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래도 전에 말했던 일요일 등교가 화근이 아닐까 싶다. 아까부터 인상을 잔뜩 쓰고는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쉽사리 말 붙이기도 뭣하다. 그래도 누나로서 한 번 물어는 봐야겠다. 방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보니 일기장에 무언가를 꾹꾹 눌러 적고 있었다.

“현수야, 무슨 일 있나?”
“니는 상관하지 마라. 내 일이다.”

저거저거, 머리 굵어지더니 내한테도 반말을 찍찍 한다. 그래도 저렇게 짜증을 부리는 애가 아닌데, 더욱 더 걱정이 된다.

“누나한테 니가 뭐고, 니가.”
“아 그냥 좀 가라. 누나가 뭔 상관이고?”

저 녀석의 말에, 나도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뭔 상관이냐니, 그런 것도 못 물어보나?
쪼잔하게. 뭐, 여기서 더 물어 봤자 안 말해줄 것 같다. 쓰고 있던 일기장을 슬쩍 봤더니, 일기는 없고 누런 종이에 떠다니는 몇 문장 뿐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일요일 등교는 왜’
‘우리가 정치 도구인가?’
‘망할 학교. 우리를 이런 데 이용해먹나.’
‘내일은 진짜 따지러 간다.’

글을 제대로 못 읽는 까막눈인 나지만, 몇 문장만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진 몰라도, 무엇이 크게 일어난다. 확실하다.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다.

“니, 이거 뭐고?”

현수는 당황한 듯 일기장을 급히 덮고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

“...별거 아니다.”

아니기는. 쟤는 항상 거짓말 할 때 눈을 피한다. 티가 팍팍 나는데 별거 아니긴 무슨. 이 녀석이 또 정의감에 불타서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저번에도 그런 적이 있다. 작년 12월쯤 이었던가.
골목에서 삥 뜯는 양아치들한테 뭐라 그러다가 얻어맞고서는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돌아왔었지. 이번엔 무슨 일을 저지르려나. 말리지도 못하겠네.

“위험한 짓만 하지 마라. 알았제”

또 눈을 피하며 말한다.

“...알았다. 알아서 한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왔다. 이미 해는 산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거지를 좀 하고 방에 들어가서 자야겠다.

다음 날이 되고, 느지막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현수는 이미 학교에 갔나 보다. 일찍도 갔네. 밥도 안 먹고. 한숨을 쉬며 밀린 집안일을 했다.
옷을 빨고, 교복을 다림질하고, 집을 청소했다. 요새 애들은 부모가 없다 그러면 무시한댄다. 그러니 내가 최대한 부모 역할을 할 수밖에.
집안일을 끝내니 벌써 하늘에는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휴학도 얼마나 할 수 있으려나. 또 구인 팸플릿을 집어들었다. 이젠 일용직이라도 해야 하나. 당장에 생활비가 부족하니, 해야지 뭐. 힘 쓰는 건 자신있으니까. 불현듯 현수 생각이 났다. 지금쯤이면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왜 안 오는 거지? 청소 당번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늦진 않을 텐데. 오늘은 야자 하는 날도 아닌데… 어제의 일기장이 마음에 걸린다.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가. 한번 생각하니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원래도 정의감에 불타는 아이라 다치고 오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어제의 일기장 내용으로 봐서는 그냥 가볍게 무릎 좀 까지고. 눈두덩이 좀 붓고. 그 정도가 아닐 거다. 경찰에 체포라도 되면 어쩌나. 빨갱이로 몰려서 그 여린 애가 많이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아니야. 그럴리가 없다.

아무리 그 녀석이라도, 제 몸은 사리겠지. 그렇겠지. 그래야겠지. 그렇고 말고. 괜찮을 거다.

그래야만 해. 그 애까지 사라지면, 나는,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 즈음, 현관에서 열쇠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다행이다…

“너 어디 갔다 이제 오는데! 벌써 어둡다 아이가!”

그 녀석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다. 아, 화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라. 왜 잘못한 건 난데 니가 사과하는데? 착해 빠져서는…
걱정했다고, 뭐 하다 왔냐고 묻고 싶은 진심이 입 안에서 맴돌다 결국 터져 버렸다.

“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빨리빨리 좀 댕기라. 뭐 하다 왔는데?”
그 녀석이 입술을 몇 번 잘근 깨물다 입을 뗐다.
“내일…학교 가는 게 이해가 안 돼서 회의하고 왔다.”

회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그냥 머릿속 어딘가에 묻어 두기로 했다.

“...됐다. 어쨌든 왔으니까… 니 좋아하는 김치국 끓여 놨다. 밥 퍼서 무라.”
“...응.”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정적이. 이 분위기가. 키는 멀대같이 커가지고는, 올려다보게 만들고.
그래도…나쁜짓 하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네. 먼저 방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까무룩, 눈이 감겼다. 너무 피곤했나.

오늘은 2월 28일. 그 문제의 일요일 등교날이다. 오늘은 일찍 눈이 떠져서 현수가 집을 나서는 것을 배웅할 수 있었다. 왜일까, 이 불길한 예감은. 평소처럼 옷을 빨고, 교복을 다림질하고, 집을 청소했다. 평소랑 똑같은 날인데, 뭔가 허전하네. 그 녀석이 없어서 그런가. 그러다 오후 1시 쯤, 반찬을 만들다 시끄러운 전화기 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따르르릉-!

급히 전화를 받았다. 달칵. 바로 끊겼다. 중요한 건 아니었던 건가. 현수에 관련된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장을 보러 가야겠다. 물도, 쌀도 똑 떨어져버렸네. 빨리 다녀와야겠어. 장바구니 하나를 집어들고 마트로 향했다.
우리 집은 집값이 그나마 싼 시골. 마트를 가려면 한 시간은 내리 걸어야한다. 학교도 마찬가지고. 아, 그 녀석 학교가 이 근처던가? 음, 그랬던 것 같다. 마트에 도착해 들어가려는데 학교 후문에서 학생 몇 명이 슬금슬금 담을 넘어 나오는 게 보였다. 땡땡이인가.

나도 어릴 땐 가끔 그랬지. 추억이네. 잡념을 털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학생들이 몇 명 더 담을 넘어 나왔다. 단체로 일탈이라도 하는 건가. 일요일 등교가 어지간히 싫었나 보네. 오늘 누구였던가, 유세를 한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그걸 보러 가는 건가? 그런데도 학생은 계속, 계속 빠져나왔다. 맨 먼저 나왔던 아이가 이쪽이라는 듯 다른 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곧 빠져나온 이들 중 가장 커 보이는 학생이 한 종이를 읽었다. 우렁차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

시위라도 하는 건가? 저긴…현수의 학교인데. 학생들이 행진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를 알아챈 선생들이 학생 몇 명을 막아섰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뭐라뭐라 하는 건 어느정도 들렸다.

“...공산당…빨갱이 놈들…학생으로서…”

아, 못 들어주겠네. 생각해보니 현수도 저기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저딴 말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머리에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진정하자, 설마 저기 있을 리가. 그냥,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돼.
머리로는 그렇게 되뇌면서도 내 발걸음은 학생들을 향해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하늘을 찢고, 땅을 깨뜨리는 함성 소리. 가슴이 점점 뛰어왔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이들은 불꽃이구나. 이들은 우직한 바위이면서도 피어나는 새싹이었고, 민주화의 바람이구나…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현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 했다. 아, 니가 이토록 용맹한 아이였는지, 나는 몰랐다. 니가 이토록 자랑스러운 아이였던지, 나는 잊고 있었다.

칼바람을 감히 체로 잡으려 하다니, 한심했구나. 나가자, 나가자. 저 민주화를 향하여. 당장이라도 너를 품에 안고 고맙다, 미안하다 속삭이고 싶지만, 그러면 또다시 바람의 발목을 붙잡는 꼴이겠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뿐이다.
“현수야!”

그 애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다. 너와, 나의, 모두의 바람.
이제는 니가 그 바람이 되어 불어와주렴, 나의 자랑스러운 동생아.

“앞으로 나가라! 너를 믿어라! 니 바람을 꼭 이 세상에 휘몰아쳐라!”

그 애가 활짝 웃어 보이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그래 가거라.
너의 바람을 온 세상에 휘몰아치러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