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은상(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상)
음소거 버튼
충남여자중학교 1학년 김단아
나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통제할 수 있는 ‘음소거(Mute)’ 버튼의 위치를 안다는 것이다. 그 버튼은 텔레비전 리모컨이 아니라,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다.

가족들이 거실에서 웃고 떠들 때, 나는 조용히 그 버튼을 누른다.
친구들이 나를 빼고 자기들만의 언어로 소곤거릴 때, 숙제는 왜 안 해왔냐고 묻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 나는 반사적으로 나를 음소거 모드로 전환한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고요하고 안전하다. 누구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는 완벽한 방음벽 안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은 이방인이 되었다.

그날은 유난히 소음을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억지로 끌려간 할머니댁, 친척들의 의미 없는 질문과 평가들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되기로 작정했다. 조용히 빠져나와 먼지가 켜켜이 쌓인 할머니의 작은 서재로 숨어들었다. 책꽂이 구석, 빛바랜 법률 서적들 사이에 웬 낡은 나무 상자가 하나 있었다. 호기심에 열어본 상자 안에는 할머니의 소녀 시절로 보이는 흑백 사진 몇 장과 함께, 접혀서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징계 사유서’

딱딱한 명조체로 찍힌 글씨가 눈에 박혔다. 이름은 분명 할머니의 것이었다. 그리고 징계 사유는 ‘불온 집회 참가로 인한 교칙 위반’.
1960년 2월 28일.

나는 그 종이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시끄럽던 공간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가 침묵을 깨는 존재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할머니, 이거 뭐야?”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할머니는 종이를 보더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 있던 엄마가 황급히 종이를 뺏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거에 관심 갖지 말고 방에 들어가 있어.” 또다시 나를 향한 음소거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불온 집회’. ‘교칙 위반’. 내가 아는 할머니는 법과 규칙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교칙을 위반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사진 속, 단발머리를 한 채 카메라를 매섭게 노려보던 소녀는 대체 누구였을까.

며칠 뒤, 나는 다시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종이에 대해 다시 물었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창밖만 바라보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내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래서 그냥 걸었어. 내 발이 내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할머니는 그날의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몇 마디는 어떤 역사책보다도 선명했다.
목소리를 빼앗긴 소녀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거리를 걸었던 풍경. ‘내가 여기 있다’고, ‘너희가 틀렸다’고 온몸으로 외쳤던 그들의 침묵의 함성.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할머니가 지키려 했던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음소거시키지 않을 권리였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내 안에서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나를 빼고 이야기할 때, 예전처럼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대신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 해? 나도 같이 듣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부당한 일을 보았을 때, ‘나서면 피곤해진다’는 생각 대신, 흑백사진 속 할머니의 눈빛을 떠올렸다.

가장 큰 변화는 집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일방적으로 내 진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마음속의 음소거 버튼을 내던져 버렸다.

“아니요. 저는 아빠가 정해놓은 길로 가고 싶지 않아요. 제 생각은 달라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것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가족들의 놀란 표정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나는 비로소 그 공간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마음속 음소거 버튼을 스스로 해제하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빼앗긴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그날의 소녀들처럼, 나 역시 내 삶의 부당함에 맞서 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렇게 나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투쟁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침묵 속에 숨지 않는다.
내 목소리는 때론 서툴고, 때론 떨리고, 때론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안다.
가장 위대한 함성도 결국에는 침묵을 깨고 나온 첫 번째 목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흑백사진 속, 겁에 질려 있던 그 소녀가 나에게 가르쳐준 가장 뜨거운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