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2·28민주운동 학생문학상 전국공모 우수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2·28 민주운동이 나를 부를 때
대구동덕초등학교 5학년 김시환
내가 살아온 도시 대구. 이 도시가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무심코, 내가 지나다니던 거리, 이 도시의 구석구석이 나를 향해 속삭이고 있었다. 그 모든 공간은 2·28민주운동 기념탑, 2·28 자유 광장, 2·28민주운동 기념 회관, 같은 바로 우리 동네, 나의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숨 쉬는 것같이 익숙한 곳들을 매일 지나치며, 나는 12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부름이 들린 것이다.
그날의 시작은 올해 5학년이 되면서 사회 시간에 “인권”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날이었다. 내가 배운 인권은 ‘누구나 사람이라면 가지는 권리이며, 차별받지 않고 평등할 권리이며,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는 대구 교육
의 대표인 IB 학교로 다른 학교들과 차별적으로 학부모가 직접 일 년에 두 번 수업을 진행하는 날이 있는데, 그 수업을 우리 엄마가 하게 되면서 그날의 시작은 계속 연결되게 되었다. 엄마는 우리 주변의 인권과 관련된 장소와 사건, 과거와 현재의 인권을 비교하는 수업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엄마가 수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와 내 동생의 손을 잡고 우리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여러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바로 대구광역시 중구 반월당 부근이다.
엄마와 손잡고 걸었던 거리, 그 모든 곳에서 1960년 2월 28일, 그날의 외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2·28민주운동을 처음으로 제대로 만나게 되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찾아 나선 2·28민주운동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은 후, 6·25전쟁을 겪으며 어수선한 나라의 혼란을 틈타 이승만 대통령이 부당한 방법으로 세 번 재임을 한 후, 또 한 번의 취임을 위해 부정선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방유세를 다니던 두 대통령 후보가 대구에도 오게 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측은 상대방 대통령 후보인 장면의 대구 선거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 것이다. 그 방법은 대구 시내 공립고등학교의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토요일 이승만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는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지시했으며, 반대로 일요일 장면 대통령 후보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몰릴 것을 염려하여 일요일 등교를 통해 상대방의 유세가 주목받는 것을 저지했다. 이 지시에 몇몇 학생들이 일요 등교 지시와 학생들이 정치에 이용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날! 바로 1960년 2월 28일! 그들이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지나간 거리가 바로 우리 집 앞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의 학교인 경북고등학교, 대구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경북여고, 대구 여고 등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다. 그날, 이 거리와 학교 주변에서는 수많은 교복을 입은 형님, 누님들이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으나, 학생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고 거리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부당함에 소리를 낸 대구 고등학생들의 목소리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3·8 대전 학생 시위로 다음은 3·15 마산 의거로, 다음은 4·11 제2차 마산의거를 거쳐 마침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민주화의 꽃인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의 가장 큰 성과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막고, 국민 스스로가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첫 번째 주인의식을 보여준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2·28민주운동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우리나라를 민주주의로 이끈 첫 시위가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대구! 그것도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에서 나와 같은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 만약 그날과 같은 일이 내 앞에 다시
일어난다면 그날의 거리 위에 서 있던 형님 누님들처럼 나도 거리로 달려 나갈 수 있을까? 심지어, 그날의 사건은 단순한 일요일 등교가 싫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란 것이 더욱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학생으로서 교육의 권리, 인권을 위해 싸운 것이었다.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시대였다고 엄마가 말해주었다. 독재라는 것은 누군가의 권력에 의해 쉽게 한 사람의 인권이 무너지는 세상이라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지금처럼 쉬운 세상이 아니었다고 말해주
었다. 그런 세상에서 아직 어린 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니 나로서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 일인 것 같아 그날의 형님 누님들의 용기가 너무나 부러우면서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작년 2024년 12월 초, 어느 날 아침 엄마는 잠을 통 자지 못한 피곤한 얼굴로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는 “계엄 사태”에 대해 걱정하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걱정도, 불안도, 기쁨도,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설명을 듣고 그날 하루 종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전쟁이나 국가 재난 사태에나 내려지는 계엄령이 내린 것은 엄마에게도 두려운 역사의 되감기 같은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불안해할까 봐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그날 엄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엄마의 이 말 한마디도, “절대, 너희들에게는 아픈 과거로의 여행을 시키진 않을 거야! 우리 손으로 다시 너희에게
행복하고 안전한 나라를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날 이후, 밤마다 조용히 각자의 마음의 불꽃이 담긴 응원 봉을 들고 거리에 나선 우리나라 국민들이 조용하지만 강하게 엄마의 말처럼 안전한 나라를 되찾아 주었다. 우리 대구에서도 1960년 2월 28일의 그날처럼, 동성로를 가득 메운 어른, 학생, 어린이들로 가득 찼던 12월이었다.
그날 그 거리에는 2·28에 구호를 외치던 형님, 누님들의 목소리도 함께 하는 듯했다. 그날, 내 손으로 처음, 나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거리에 나서면서 우리 모두의 소중한 것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스스로가 뿌듯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흔들리는 수많은 응원 봉
불빛들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눠준 그날의 내 앞, 뒤, 옆의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내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멋진 대한민국, 대구의 한 명이라는 사실로 말이다.
이렇게 2·28민주운동에 대해 알아가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 안타까움은 4·19 혁명은 교과서나, 여러 서적, 방송 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다뤄지지만, 그 4·19혁명의 시작이었던 2·28민주운동은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2·28 민주운동이 사람들 속에서 잊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중 하나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나도 그렇게 내 주변에서 수많은 2·28 관련 흔적들이 말을 걸고 있었지만 대답하지 못한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도 아직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늦게 그 부름에 대답하는 것이 미안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더 늦기 전에 그들의 부름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앞으로 나는 2·28민주운동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2·28민주운동에 대해 알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지금 누군가가 지켜 낸 세상에서 안전하게 인권을 배우고 이야기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은 과거 우리나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 중, 내가 알리고 싶은 소중한 사건 하나가 바로 2·28민주운동이다. 2·28민주운동을 통해 나 같은 학생도 나와 누군가의 인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인권이나 민주화 등은 어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우리의 이야기
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1960년 2월 28일 그날의, 형님 누님들처럼 누군가의 부당함에 맞설 용기를 기를 것이며 나 이외의 내 주변 사람의 인권도 존중하고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약속한다.
나부터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란다면 2·28의 희생이 결코 헛되이 되지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렇게 자유롭지만, 세계의 중심으로 달려가는 것은 모두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첫발을 내디뎌 준 바로 그날 1960년의 2월 28일의 학생들의 외침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이야기해야할 때인 것이다. 나는 앞으로 2·28민주운동 말고도 내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다. 2·28민주운동처럼 아직도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12년 동안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준 대구의 수많은 2·28의 목소리에 오늘에서야 나는 대답한다.
“2·28민주운동을 이끈 형님, 누님들! 당신들의 용기와 희생에 감사하며, 절대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