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민주운동 > 2·28 민주운동의 배경

2·28 민주운동의
배경

2·28민주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정치적 배경

이승만 정부의 성립과 독재 정치

제1공화국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 또는 자유당 정권으로 불리는데, 이 기간에 자행된 독재를 강조하여 이승만 독재 정권이나 자유당 독재 정권으로도 불린다.
제1공화국의 전반에는 이승만 개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중반에는 이승만 개인과 자유당이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한 정치가, 후반에는 이승만 개인보다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승만은 개인적인 정치 세력을 갖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기존의 국내 정치 세력들을 물리치고 집권하였다. 그것은 이승만이 해방 정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명망과 개인적 인기 면에서 다른 정치인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또 이승만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경쟁자들이 암살되거나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뽑힐 수 있는 유일한 후보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국민주당 세력이 지원함으로써 국내 기반이 없었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해방 후 남한의 국가 성립 과정에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승리가 내포하는 역사적 의미는 친일 관료나 경찰이 해방된 한국에서 또 다시 정치, 경제, 행정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관료 출신들의 행정 기술을 바탕으로 건국 초기의 무질서한 행정 체계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방편으로 친일 관료들을 등용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생각대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지원 세력이 없었다. 한 때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원하였던 한국민주당이 초대 내각 구성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 적대적인 세력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이승만에게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제헌국회 2년 동안 국회 내에는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반(反)이승만 세력이 강화되어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또한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제헌국회에 불참하였던 중도파와 남북협상파가 모두 참가하여 국회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제2대 국회는 처음부터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즉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부의 무능과 실책, 그리고 불법적인 행동들이 묵과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는 동안 부정부패,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국회 내 야당세가 강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이승만이 국회 내에서의 간접 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의미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유당 창당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자유당은 창당 당시부터 통치자의 필요에 의해 하향식으로 조직된 정당으로서, 이승만의 전제 권력과 장기 집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 추구를 위한 집합체로 조직된 자유당은 대중적 기반이 미약했는데, 이를 보완해 준 것이 행정권이나 경찰권 같은 관권(官權)이었다. 처음부터 지방 자치보다는 개헌을 위해 구성되었던 지방의회, 그리고 경찰력을 이용하여 일으킨 부산정치파동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췌개헌을 통하여 재집권하게 된 이승만은 반공을 구실로 반민주적 전제(專制)를 시작하였으며, 의회는 전제적 행정권에 의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승만과 자유당은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군(軍)과 방첩대, 그리고 경찰의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곧이어 이승만의 종신 연임을 보장하는 개헌안을 제출하고 “사사오입 개헌” 이라는 정치극을 연출하였다. 반면 “사사오입 개헌” 에 반대했던 세력들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반공·반독재를 표방한 신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반(反) 이승만 세력으로 결집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주당 창당이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70%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 장면(張勉, 1899~1966)이 당선되었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던 자유당에게는 민주당 장면의 부통령 당선은 큰 충격이었다. 자유당의 권위주의 체제가 강화되는 만큼 국민들의 자유당에 대한 지지는 계속 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956년 8월에 실시된 시·읍·면장 선거와 시·읍·면의원 선거에서도 잘 나타났다.

1958년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다시 한 번 민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자 236명이 얻은 표수는 총투표수의 50%를 조금 넘었지만, 민주당 후보자 199명이 얻은 표수는 총투표수의 40%가 되어 자유당과 민주당 간의 표차가 제3대 선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또한 자유당 당선자의 90%는 농촌이나 지방에서 나왔고, 민주당 당선자의 60%는 도시에서 나왔다. 특히 수도인 서울에서는 민주당이 14명의 당선자를 내고 자유당은 겨우 1명의 당선자를 내어 전형적인 여촌야도(與村野都)의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자유당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투표로 나타난 것으로,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자유당 정권에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야당과 언론을 통제할 목적으로 국가원수의 명예훼손에 관한 처벌과 범법자의 언론·교육기관 취임 자격 박탈, 그리고 공무원의 반항·선동 처벌이라는 내용의 신 국가보안법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이미 진보당 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불온 문서 투입 사건, 뉴델리 사건 등으로 야당을 탄압해 온 자유당 정권이 보다 더 확실하게 야당의 세력을 억압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은 신 국가보안법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대통령 출마 봉쇄와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려는 것이며, 변호사 접견 금지와 2심제도 폐지는 헌법 위반이라고 반대하였다.
자유당은 언론에 대한 탄압까지 자행하여 1959년 4월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야당성향의『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 특별부에서 “경향신문 발행허가 취소 행정처분 집행정지”를 결정함으로써 속간되었다. 이에 정부는 다음날로 폐간 처분을 철회하고 무기한 발행 정지 처분을 내렸다. 자유당 정권의 이러한 조치는 헌법상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 것으로, 이미 자유당 정권에게 헌법적 보장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에 도입된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공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되어, 본래의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변질되어 자유민주주의는 형식화 되어버렸다. 즉 반공주의를 철저하게 정치 탄압과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짓밟고 하나의 가식으로 만들어 파행으로 몰고 갔다. 곧 자유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권위주의적 독재정치가 되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쓰라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의 생존논리가 되어 이승만 정권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게임이 전개되도록 하기 위해 이용하는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경찰과 관료 등과 같은 비민주적인 억압수단을 이용하여 권위주의적 독재정치를 강행하였다.
이러한 독재정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적 외피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국회는 지속적인 탄압과 무력화 공작에 시달렸으나 계속 유지되었다.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과정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주기적인 선거를 준수함으로써 최소한의 정권의 정당성은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저항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를 한국 현실에서 구체화 시키고자 하였다.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풍부하게 흡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의 이상과 독재체제 강화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가장 뼈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의 심화로 줄달음쳐 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멸의 길로 들어갔다. 이전의 몇 차례 선거에서 부정과 관권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3·15 선거는 그 정도가 심했으며 부정과 불법으로 일관된 선거였다. 이러한 부정 선거에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그 분노가 최초로 폭발한 것이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의 2·28민주운동이었던 것이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이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 1년 전부터 치밀하게 부정 선거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사실 1956년과 1958년의 선거에서 민심 이반을 확인한 자유당 정권은 인기와 지지도가 낮았던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서 전면적인 부정 선거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80세가 넘은 이승만이 임기 도중에 사망하거나 직무 수행 불능 등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았던 만큼, 대통령 유고시 계승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무조건 당선시켜야 할 형편 속에서 3·15 부정 선거가 준비되었던 것이다.

1959년 3월 자유당 정권은 경찰과 지방 행정의 총수인 내무부 장관에 친일파였던 최인규(崔仁圭, 1919~1961)를 임명하였다. 최인규는 온갖 부정 선거 운동을 예고하고, 그는 지방관서 순시 때 “공무원이 집무 시간 외에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은 선거법이나 공무원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또 “자유당을 리드하는 공무원은 파격적으로 승진시키겠다.”라고 약속하면서 자유당을 위해 모든 공무원을 동원하려고 하였다.
1959년 6월 29일 자유당이 전당대회에서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1960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함에 따라 부정 선거 준비를 본격화한 내무부는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구체적인 부정 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였다. 즉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의 지침과 선거 당일 자유당 완장 착용자를 투표소 1백 미터 밖에 배치할 것, 투표함 수송 도중 투표함을 교체할 것, 개표 시 야당 표를 자유당 표로 바꿔칠 것,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5% 이상으로 할 것 등의 세부 계획을 마련하였다.

자유당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준비하는 한편, 야당의 분열 책동과 일반 유권자의 포섭 공작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당내 신·구파 간의 갈등과 자유당의 분열 책동 속에서 가까스로 1959년 11월 26일에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조병옥(趙炳玉, 1894~1960)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조병옥이 신병 악화로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정부는 2월 3일 “농번기를 피해서” 라는 이유를 내세워 3월 15일을 선거 날짜로 공고하였고, 이에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조병옥이 2월 15일 미국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급서함으로써 야당과 국민은 신익희에 이어 또 한 번 야당의 대통령 입후보자를 선거 운동 기간 막바지에 잃게 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조병옥의 급서로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이승만의 승리가 확정된 가운데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도 이기붕의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미 준비해 온 부정 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치안국장은 1960년 2월경 치안국의 과장급등 66명으로 선거 독찰반을 편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선거 운동의 준비 과정을 독려하는 한편, 다시 이 독찰반을 감시하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2중·3중으로 물샐틈없이 부정 선거를 준비하였다.

3·15 정·부통령 선거 운동이 최고조에 달하던 1960년 2월 28일 장면의 유세가 대구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해 자유당은 이날 선거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즉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 10일 대구 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 학교장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자유당 유세날인 2월 27일(토요일)에는 집집마다 1명 이상씩을 유세장에 동원하고, 각 기관·업소는 오후 1시 예정인 유세 강연 시작에 늦지 않도록 12시까지 업무를 끝내고 청중을 유세장에 최대한 동원할 것이며, 둘째, 민주당 유세날인 2월 28일(일요일)에는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행사를 가지게 하고,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행사를 계속하는 한편, 정치에 민감한 경향이 있는 고교생들은 일제히 등교시켜 유세장에 나갈 수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경제적 배경

국민 경제 수립의 실패

8·15해방으로 식민지 지배와 사회구조는 동요하고 해체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해방이 갖는 경제적 의미는 식민지 경제를 청산하고 민족 국가의 경제적 기초로서의 자주적 국민경제를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소유하게 함으로써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생활의 향상을 도모함으로써 민족 경제를 확립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해방 당시 한국 경제는 농업 부문에서 여전히 영세한 소농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공업 부문에서는 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까지 겹쳐 공업시설과 지하자원이 분할되었고, 남농북공(南農北工)적인 국내 분업체계의 발달 가능성마저 잃게 되었다. 특히 남한의 산업체계를 기형적으로 위축시켜 자생적 경제발전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정과 한국민주당의 결합에 의한 경제구조 변화는 미군정의 대(對) 한국정책에 의해 전개되었다. 미군정의 토지정책은 근대적 토지소유제의 확립이 아니라, 과격한 혁명의 방지 및 공산주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반공 국가를 조속히 건설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실제 시행된 농지개혁은 식민 통치 이래 당시까지 남아 있던 지배예속적인 토지 소유 관계를 청산하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자립적 국민경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당시의 시대적 요구와 일치할 수 없었다.
또한 미군정은 귀속재산의 관리에서 오는 부조리와 문제점을 극복하고 운영의 효율화를 꾀한다는 명분으로 귀속 산업체의 불하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반공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국 자본주의 경제의 담당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목적이 내재된 조치였다. 이러한 일본인 사업체의 불하는 해방 이후 한국경제의 자본축적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경제와 자본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미군정의 경제정책이 가져다 준 결과는 자립적 국민경제의 건설이 아니라 식민지 경제구조가 가진 파행성의 연속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악성 인플레이션, 실질 임금의 하락, 실업률의 증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경제구조의 파행성을 보완해 준 것이 미국의 경제 원조였고, 결국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가 없이는 지탱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론적으로 미군정 시기에 이루어진 한국 자본주의 재편성의 결과는 비자본주의적 농촌 경제의 잔존, 매판적 관료 독점자본의 형성, 대(對) 미국 의존적 경제체제의 성립으로 귀결되었다.

경제적 불황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이루어진 일본인 귀속재산 처리는 미군정 시기 등용된 친일파들로 하여금 이권을 탈취하게 하여 경제 윤리를 타락시켰으며, 이후 한국의 경제구조를 특징지었다. 토지 분배의 결과 농민들은 과중한 부채에 시달려 대규모 이농 현상을 초래하였고, 이들은 다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여 사회적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민중의 염원을 무시한 경제정책은 농촌경제의 균형적인 발전 가능성을 잃게 하였고, 그것은 곧바로 사회적 불만과 불안으로 이어져 2·28민주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주된 경제적 상황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원조경제는 결정적으로 해방 이후로부터 2·28민주운동에 이르기까지의 경제구조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경제구조를 대외 의존적인 성향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의 자립 경제체제의 확립을 저해하여 파행적인 경제구조를 형성시켰고, 한국의 정치적 자주성을 박탈하였다.

이승만 정권 시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한국경제를 독점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유착하여 일본인들에게서 접수한 적산(敵産)을 싼값으로 매입하거나 무상으로 불하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적산의 독점적 불하와 매입은 초기부터 한국의 경제활동에 있어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후반기에 오면서 중소기업들은 파산하고 소수의 대기업들만이 번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분배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였다. 1950년대의 미국 원조는 한국 재정수입의 거의 절반을 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세계적 불황,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갈등으로 원조가 급속히 감소하자 1957년부터 원조경제는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 변화가 이루어져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제분·제당·면방직의 삼백(三白) 산업은 잠시 호경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국내공업과 유기적 관련을 갖지 못한 무상 원조 및 시설재를 기반으로 협소한 국내시장에만 의존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원조의 삭감, 국내시장의 협소함, 시설 과잉이라는 문제가 현실화됨에 따라 한국경제는 위기 국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말 한국경제는 미국원조 감소에 따른 성장률의 둔화, 자유당 간부, 관료, 군, 재벌 등 특권층과 일반 서민들 간의 사회 불평등의 심화, 총노동 인구의 45%에 달할 정도의 실업률 증가 등이 나타났으며, 이는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여 사회적 적대감을 형성해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도시화와 교육의 확대와 매스컴의 성장으로 한국사회는 매우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급격한 도시화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도시로의 인구이동과 교육의 확대, 퇴역군인의 증대, 사회의 상업화, 농촌생활의 피폐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1955년 현재 전국의 국민 가운데 인구 2만 이상의 도시에 사는 사람은 전체의 43.2%였는데, 이는 1949년 현재의 27.5% 보다 크게 늘어난 것이다. 같은 기간 중 인구 5만명 이상의 도시에 사는 비율은 18.3%에서 34.5%로 늘어났고, 10만명 이상 도시에 사는 비율도 14.7%에서 28.8%로 크게 늘어났다. 교육의 확대로 중등학교 학생수는 1947년의 2만7천4백 명에서 1956년에는 73만 3185명으로 늘어났고, 전문학교 및 대학교 학생수도 같은 기간 중 1만 300명에서 9만 104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문맹률은 1945년 78%에서 1956년에는 10%로 급감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성장으로 일간신문의 발행부수가 특히 도시 지역에서 크게 늘어났는데, 1946년 총 38만 1300부였던 신문발행 부수가 1955년에는 198만부로 늘어났다. 이 같은 신문발행 부수의 격증은 도시화와 교육의 확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시화와 교육의 확대, 그리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비판적인 민주의식의 고양을 가져왔고, 이것이 반이승만, 반자유당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비판적인 민주의식에 따른 이승만 정권의 부정, 부패에 대한 분노와 경제구조의 모순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결합하여 폭발한 것이 대구 2·28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다.

지역적 배경

일제하 대구의 학생독립운동

2·28민주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1930년대의 반전 운동과 독서운동, 1940년대의 비밀 지하운동 등 지속적인 항일운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 민주 교육을 받은 한글세대가 민주주의와 동떨어진 자유당 정권의 노골적인 학원 간섭과 같은 현실 정치에 분개하여 궐기한 학생운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28민주운동은 부정과 불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연속성 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대구에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1899년 달성학교를 시작으로 다수의 초등교육기관이 생겨났다. 1906년에 설립된 계성학교는 이듬해 개교한 신명학교와 더불어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하여 대구의 항일민족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1907년에는 서상돈·김광제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또 1915년에 윤상태·이시영·서상일 등은 영남 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3·1운동 때 대구지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파리장서사건(기미 유림단 사건)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3월 8일 만세시위의 봉화를 올리며 3·1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0월 29일 대구고보 4학년생들이 학제 개편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하여, 거의 매년 동맹휴학을 통해 조선 역사 과목 신설과 조선어 시간 연장, 일본인 교사의 배척 등을 요구하였다. 1923년과 1925년의 계성학교 동맹휴학, 1926년과 1928년 대구고보의 동맹휴학, 1929년의 대구상고의 동맹휴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러한 동맹휴학은 처음에는 일본인 교원에 대한 배척과 민족적 감정이 작용했으나 점차 식민지 교육정책과 일제에 대한 항일투쟁으로 바뀌어 갔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학생들과 독립투사들의 항일투쟁이 계속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장진홍의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그 다음날인 11월 4일 대구농림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항일시위를 감행하였고, 그 뒤를 이어 대구고보와 대구상고 학생들도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각종 동맹휴학 사태는 계속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항일민족운동 본거지로서의 모습을 뚜렷이 하였다. 1928년 대구 학생비밀결사, 1941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연구회인 다혁당(茶革黨),1943년 5월 대구상고의 태극단(太極團), 1944년 8월 대구학병의거 사건 등이 대표적인 항일학생운동이었고, 이후에도 항일운동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대구 시민의 정치적 성향

(1) 대구 시민의 의식 구조
대구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대분지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영남 내륙교통의 중심지로서 낙동강 문화권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대구는 전통적인 사회구조와 의식 구조를 보다 강하게 유지하면서 근대적인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구는 정치·군사상의 요지였으며, 영남 지방의 찬란한 정신사의 중심지였다. 이와 같은 강인한 민족의식은 3·1운동으로, 해방 직후의 10·1대구사건(10월사건)으로 2·28민주운동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지리·풍토적으로 다양한 자연 조건과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역사·사회적인 조건은 시민들의 독특한 의식 구조 속에 녹아 있었다. 이러한 의식 구조는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구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1960년 2·28민주운동이 일어난 밑바탕에도 이러한 대구 시민의 독특한 의식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관료적 농업 사회의 산물인 전근대적 의식 상태를 보수주의·권위주의·형식주의·배타적 폐쇄주의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적 가족제도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상공업화의 진전이 느리고 유교적 가족 제도의 전통이 강할수록 강하게 남아 있었다. 서울과 부산에 비해서 상공업화의 진전이 느렸던 대구는 다른 지방에 비해 유교적 전통이 강하여 전근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전근대적 의식 구조는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적 성향을 띠기도 하였지만, 권력의 부정·부패에 대하여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저항하기도 하였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8도 인심론에서는 “경상도인 태산교악(慶尙道人泰山喬嶽)”이라하고 있다. 경상도의 인심을 “태산교악”이라고 한 것은 주민의 성격이 강직한 점을 말한 것이며, 이는 많은 역사적 사실, 즉 삼국 통일 정신의 바탕이 된 화랑도, 고려 멸망 때 많은 입절지사(立節之士)의 배출, 임진왜란 때 의병의 선도적 역할, 동학의 대두, 한말 의병들의 활동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제의 고등경찰이 가장 고심한 것이 함경도와 경상도의 소위 사상범 색출이었다는 것도 이러한 강직성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강직성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자유당 치하에서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야당 도시”라는 말을 듣게 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 운동에 가장 먼저 저항하게 한 힘이 되었다.
(2) 정치적 동향과 야당 도시
독재 정권의 폐정과 부정 선거 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거의 극에 달하고 있을 때인 1960년 2월 28일, 부정선거 움직임에 분노한 학생들의 시위가 대구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3·15부정선거 운동에 대한 최초의 항거였다. 이는 정부수립 후에 줄곧 야당세가 강한 대구에 대해 이승만 정권의 선거 부정이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대구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당선율이 높았던 것은 물론이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를 했던 곳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58년 전국에서 유일하게 야당 시장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온 국민이 주목하는 현상이었다.

대구 지역의 정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나 건국 초기에는 대체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과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일반 시민들도 이를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에는 대구를 지켜내는 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병옥의 공이 컸다는 인식이 있기도 했지만, 지역 의식을 초월하여 조병옥에 대한 지지율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휴전 이후부터 자유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승만·이기붕의 집권 세력과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 세력과의 대결이 가열되는 과정에서 대구의 정치적 정서는 대체로“야당 도시”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대구라는 지역적 테두리를 거의 의식하지 않은 국가적 차원의 반독재·반불법·반부패에 대한 항거 의지와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절실한 염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대구는 3개의 투표구로 나뉘어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평균 투표율은 약 80%에 달하였으며, 결과는 한국민주당 소속의 후보들이 모두 당선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불참했던 정치세력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선거 결과는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부에 크게 불리하게 나타났다. 이는 재선된 의원이 겨우 34명에 불과했고, 제헌국회에서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했던 보수적인 정당과 정치 단체의 원내 진출이 크게 낮아진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대구에서는 3개의 선거구에 43명이 입후보하였는데, 무소속 2명과 불교 1명이 당선되었다.

5·30총선거 결과 야당 세력이 대거 원내에 진출하였고, 이어 부정부패에 대한 야당의 공세가 격렬해지자, 집권 세력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민주국민당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창당된 것이 자유당이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1952년 발췌 개헌으로 정·부통령 선거가 직접선거로 실시되었고,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 1872~1964)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유권자의 약 73%가 투표에 참여하여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최다 득표를 하였지만, 부통령에는 조병옥이 이승만의 지지를 받은 함태영을 누르고 최다 득표를 하였다. 또한 1954년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입후보자가 22명으로 평균 7대 1의 경쟁을 보였고, 선거 결과 민주국민당의 2명과 무소속 1명이 당선되어 야당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6년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각 당의 선거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급서함으로써 선거 양상이 급변하였으며, 민주당은 자연스럽게 부통령 후보의 당선에 주력하였다. 5월 15일 대구 시내 투표구에서는 유권자의 84%가 투표에 참여하였다. 선거의 결과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지만, 대구의 경우는 대통령에 조봉암(曺奉岩, 1898~1959), 부통령에 장면이 압도적으로 다수표를 획득하였다.

당시 우리 선거사상 초유의 개표 중단 사건이 대구에서 발생하였다. 야당세가 강한 대구에서 자유당 후보를 위해 의도적으로 개표 부정시비가 연출되어 개표 업무가 완전히 중단되었다. 개표가 중단된 동안 대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개표를 완료하여 장면이 이기붕을 8만 7천여 표의 차이로 앞서고 있어 대구의 개표 결과에 따라 부통령의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자유당의 방해로 개표 부정 시비가 가려지지 않다가, 19일 오후 장면의 당선을시인하는 대통령의 담화 발표와 함께 경북도청 회의실에서 자유·민주 양당 대표 간의 연석회의가 진전을 보여, 20일에 다시 개표 업무가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5일 간에 걸친 대구 시민의 주권수호 투쟁이었으며, 다시 한 번 불의와 탈법에 타협하지 않는 대구 시민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구에서 6개의 선거구로 나뉘어 비교적 무난하게 투표가 진행되었으나, 개표 과정에서 또 다시 여러 문제가 생겨났다. 엄청나게 많은 무효표가 쏟아져 피아노식 개표라는 말이 나돌았으며, 개표 부정이 드러나 개표가 일시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는 최초에는 민주당 3명, 자유당 2명, 무소속 1명이 당선되었으나, 자유당 2명에 대해서는 당선무효 판결이 내려져 대신 민주당 2명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최종적으로 민주당 5명, 무소속 1명이 당선되어 여전히 야당 성향을 보여주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개헌선 확보실패로 자유당은 초조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것은 고령(高齡)이었던 이승만의 대통령직 계승권이 반대당인 민주당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그 사주를 받은 행정부는 집권 연장을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고, 이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선거운동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 대구의 2·28민주운동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