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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횃불 2·28 민주운동

지역적 배경

일제하 대구의 학생독립운동

2·28민주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1930년대의 반전 운동과 독서운동, 1940년대의 비밀 지하운동 등 지속적인 항일운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 민주 교육을 받은 한글세대가 민주주의와 동떨어진 자유당 정권의 노골적인 학원 간섭과 같은 현실 정치에 분개하여 궐기한 학생운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28민주운동은 부정과 불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연속성 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대구에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1899년 달성학교를 시작으로 다수의 초등교육기관이 생겨났다. 1906년에 설립된 계성학교는 이듬해 개교한 신명학교와 더불어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하여 대구의 항일민족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1907년에는 서상돈·김광제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또 1915년에 윤상태·이시영·서상일 등은 영남 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3·1운동 때 대구지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파리장서사건(기미 유림단 사건)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3월 8일 만세시위의 봉화를 올리며 3·1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0월 29일 대구고보 4학년생들이 학제 개편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하여, 거의 매년 동맹휴학을 통해 조선 역사 과목 신설과 조선어 시간 연장, 일본인 교사의 배척 등을 요구하였다. 1923년과 1925년의 계성학교 동맹휴학, 1926년과 1928년 대구고보의 동맹휴학, 1929년의 대구상고의 동맹휴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러한 동맹휴학은 처음에는 일본인 교원에 대한 배척과 민족적 감정이 작용했으나 점차 식민지 교육정책과 일제에 대한 항일투쟁으로 바뀌어 갔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학생들과 독립투사들의 항일투쟁이 계속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장진홍의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그 다음날인 11월 4일 대구농림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항일시위를 감행하였고, 그 뒤를 이어 대구고보와 대구상고 학생들도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각종 동맹휴학 사태는 계속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항일민족운동 본거지로서의 모습을 뚜렷이 하였다. 1928년 대구 학생비밀결사, 1941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연구회인 다혁당(茶革黨),1943년 5월 대구상고의 태극단(太極團), 1944년 8월 대구학병의거 사건 등이 대표적인 항일학생운동이었고, 이후에도 항일운동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대구 시민의 정치적 성향

(1) 대구 시민의 의식 구조

대구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대분지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영남 내륙교통의 중심지로서 낙동강 문화권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대구는 전통적인 사회구조와 의식 구조를 보다 강하게 유지하면서 근대적인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구는 정치·군사상의 요지였으며, 영남 지방의 찬란한 정신사의 중심지였다. 이와 같은 강인한 민족의식은 3·1운동으로, 해방 직후의 10·1대구사건(10월사건)으로 2·28민주운동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지리·풍토적으로 다양한 자연 조건과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역사·사회적인 조건은 시민들의 독특한 의식 구조 속에 녹아 있었다. 이러한 의식 구조는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구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1960년 2·28민주운동이 일어난 밑바탕에도 이러한 대구 시민의 독특한 의식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관료적 농업 사회의 산물인 전근대적 의식 상태를 보수주의·권위주의·형식주의·배타적 폐쇄주의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적 가족제도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상공업화의 진전이 느리고 유교적 가족 제도의 전통이 강할수록 강하게 남아 있었다. 서울과 부산에 비해서 상공업화의 진전이 느렸던 대구는 다른 지방에 비해 유교적 전통이 강하여 전근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전근대적 의식 구조는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적 성향을 띠기도 하였지만, 권력의 부정·부패에 대하여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저항하기도 하였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8도 인심론에서는 “경상도인 태산교악(慶尙道人泰山喬嶽)”이라하고 있다. 경상도의 인심을 “태산교악”이라고 한 것은 주민의 성격이 강직한 점을 말한 것이며, 이는 많은 역사적 사실, 즉 삼국 통일 정신의 바탕이 된 화랑도, 고려 멸망 때 많은 입절지사(立節之士)의 배출, 임진왜란 때 의병의 선도적 역할, 동학의 대두, 한말 의병들의 활동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제의 고등경찰이 가장 고심한 것이 함경도와 경상도의 소위 사상범 색출이었다는 것도 이러한 강직성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강직성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자유당 치하에서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야당 도시”라는 말을 듣게 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 운동에 가장 먼저 저항하게 한 힘이 되었다.

(2) 정치적 동향과 야당 도시

독재 정권의 폐정과 부정 선거 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거의 극에 달하고 있을 때인 1960년 2월 28일, 부정선거 움직임에 분노한 학생들의 시위가 대구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3·15부정선거 운동에 대한 최초의 항거였다. 이는 정부수립 후에 줄곧 야당세가 강한 대구에 대해 이승만 정권의 선거 부정이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대구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당선율이 높았던 것은 물론이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를 했던 곳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58년 전국에서 유일하게 야당 시장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온 국민이 주목하는 현상이었다.

대구 지역의 정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나 건국 초기에는 대체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과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일반 시민들도 이를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에는 대구를 지켜내는 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병옥의 공이 컸다는 인식이 있기도 했지만, 지역 의식을 초월하여 조병옥에 대한 지지율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휴전 이후부터 자유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승만·이기붕의 집권 세력과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 세력과의 대결이 가열되는 과정에서 대구의 정치적 정서는 대체로“야당 도시”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대구라는 지역적 테두리를 거의 의식하지 않은 국가적 차원의 반독재·반불법·반부패에 대한 항거 의지와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절실한 염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대구는 3개의 투표구로 나뉘어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평균 투표율은 약 80%에 달하였으며, 결과는 한국민주당 소속의 후보들이 모두 당선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불참했던 정치세력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선거 결과는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부에 크게 불리하게 나타났다. 이는 재선된 의원이 겨우 34명에 불과했고, 제헌국회에서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했던 보수적인 정당과 정치 단체의 원내 진출이 크게 낮아진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대구에서는 3개의 선거구에 43명이 입후보하였는데, 무소속 2명과 불교 1명이 당선되었다.

5·30총선거 결과 야당 세력이 대거 원내에 진출하였고, 이어 부정부패에 대한 야당의 공세가 격렬해지자, 집권 세력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민주국민당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창당된 것이 자유당이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1952년 발췌 개헌으로 정·부통령 선거가 직접선거로 실시되었고,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 1872~1964)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유권자의 약 73%가 투표에 참여하여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최다 득표를 하였지만, 부통령에는 조병옥이 이승만의 지지를 받은 함태영을 누르고 최다 득표를 하였다. 또한 1954년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입후보자가 22명으로 평균 7대 1의 경쟁을 보였고, 선거 결과 민주국민당의 2명과 무소속 1명이 당선되어 야당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6년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각 당의 선거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급서함으로써 선거 양상이 급변하였으며, 민주당은 자연스럽게 부통령 후보의 당선에 주력하였다. 5월 15일 대구 시내 투표구에서는 유권자의 84%가 투표에 참여하였다. 선거의 결과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지만, 대구의 경우는 대통령에 조봉암(曺奉岩, 1898~1959), 부통령에 장면이 압도적으로 다수표를 획득하였다.

당시 우리 선거사상 초유의 개표 중단 사건이 대구에서 발생하였다. 야당세가 강한 대구에서 자유당 후보를 위해 의도적으로 개표 부정시비가 연출되어 개표 업무가 완전히 중단되었다. 개표가 중단된 동안 대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개표를 완료하여 장면이 이기붕을 8만 7천여 표의 차이로 앞서고 있어 대구의 개표 결과에 따라 부통령의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자유당의 방해로 개표 부정 시비가 가려지지 않다가, 19일 오후 장면의 당선을시인하는 대통령의 담화 발표와 함께 경북도청 회의실에서 자유·민주 양당 대표 간의 연석회의가 진전을 보여, 20일에 다시 개표 업무가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5일 간에 걸친 대구 시민의 주권수호 투쟁이었으며, 다시 한 번 불의와 탈법에 타협하지 않는 대구 시민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구에서 6개의 선거구로 나뉘어 비교적 무난하게 투표가 진행되었으나, 개표 과정에서 또 다시 여러 문제가 생겨났다. 엄청나게 많은 무효표가 쏟아져 피아노식 개표라는 말이 나돌았으며, 개표 부정이 드러나 개표가 일시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는 최초에는 민주당 3명, 자유당 2명, 무소속 1명이 당선되었으나, 자유당 2명에 대해서는 당선무효 판결이 내려져 대신 민주당 2명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최종적으로 민주당 5명, 무소속 1명이 당선되어 여전히 야당 성향을 보여주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개헌선 확보실패로 자유당은 초조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것은 고령(高齡)이었던 이승만의 대통령직 계승권이 반대당인 민주당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그 사주를 받은 행정부는 집권 연장을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고, 이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선거운동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 대구의 2·28민주운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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